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봉덕길 131-144
창건 634년 · 삼국시대
조계종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봉덕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소속 사찰. 구암사에 대해서는 634년(무왕 35) 숭제 법사(崇濟法師)가 구암사(龜巖寺)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가장 먼저이다. 절을 세운 숭제 법사가 신라 경덕왕 때 활약하였던 진표(眞表)의 스승인 숭제와 같은 인물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1392년(태조 1) 구곡(龜谷) 각운(覺雲)이 중창하였고, 태종 때에도 중창한 뒤 구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구암사’라 함은 사찰 동편 지점에 숫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고, 대웅전 밑에는 암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암사라 하였으며, 신령스러운 거북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구암사가 있던 산을 영구산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절터는 현재 구암 폭포가 있는 부근이었다. 이후 사세가 점차 번창하여 전국 규모의 수도 도량을 이루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구암사가 다시 사세를 크게 일으킨 것은 영조 때[재위: 1724~1776] 화엄 종주인 설파(雪坡) 상언(尙彦)[1707~1791] 이 머물면서부터이다. 설파는 구암사에서 선강 법회(禪講法會)를 열어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이로부터 100여 년간 화엄 종맥의 법손이 계승되었다. 당시 구암사는 전국 굴지의 사찰로 각처에서 운집한 승려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1800년대 초에는 백파(白坡) 긍선(亘璇)[1767~1852]이 현재의 절터에 건물을 중창하고 선강 법회를 열어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승려 백파의 설법으로 입산수도한 승려가 각처에서 운집하여 선문 중흥조라 일컬었고, 그 법맥이 고창 선운사와 정읍 내장사, 장성 백양사, 해남 대흥사 등에 전법(傳法)하였으며, 헌종(憲宗) 때는 승려 설두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이 친교 정진하였다. 특히 긍선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교유하며 많은 편지를 남겼다. 이후 정관(正觀)[?~1813], 설두(雪竇) 유형(有炯)[1824~1889], 설유(雪乳) 처명(處明)[1858~1904], 학명(鶴鳴)[1867~1929], 석전(石顚)[1870~1948], 운기(雲起)[1898~1982] 등 많은 고승이 구암사에서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설두는 성리학자인 노사 기정진과 불교 사상에 관해 문답을 나누었으며, 설유는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와 사상을 교류하였다. 조선 후기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경상은 긍선의 인품에 감동하여 인근 전답 350마지기를 기부하였고, 고종 때 어사인 이면상(李冕相)은 절 건물을 중건하기도 하는 등 학자나 정치인들과 얽힌 일화도 많이 전한다. 한편 ‘석전’의 법호는 김정희가 긍선에게 준 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김정희는 긍선에게 ‘석전만암(石顚萬庵)’이란 글을 주며 뒷날 제자 중에서 도리를 아는 자에게 이 호를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글은 긍선에서 처명으로 전해졌고, 처명이 박한영(朴漢永)에게 법호 석전을 주었다. 구암사에서는 구한말 간재 전우가 승려 설유와 함께 불학을 연구하였으며, 많은 고승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대한 불교 지도자 영호당 대종사도 도제 양성과 근세 불교 교육을 위해 크게 진력하였던 역사적 산실이다. 재가자로는 이광수(李光洙), 서정주(徐廷柱), 신석정(辛夕汀), 조지훈(趙芝薰) 등이 있고, 출가자로는 청담, 청우, 서경보, 운허, 운성, 운기, 만암 대종사 등이 있다. 유명한 대종사를 줄줄이 배출한 교학의 중심지답게 구암사에서 저술된 책들도 많다. 긍선은 구암사에서 『정혜 결사문(定慧結社文)』, 『선문수경(禪門手鏡)』 등을 저술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그러나 구암사는 숲이 깊어 전란이 있을 때마다 그 국난을 몸소 겪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어서 1950년 6·25 전쟁 때에 많은 빨치산들이 숨어들어 특히 불교 유적의 소실(燒失)을 많이 당하였다. 1957년 복원하였으나 1959년 다시 불에 탔고 이것을 1973년 5월에 중창하였다. 1997년에는 삼성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